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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따라/국내여행

인천도시역사관 1층 .... 2026.07.14

by 금대봉 2026. 7. 14.

 

 

인천도시역사관 인천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238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자리한 인천도시역사관을 다녀왔다. 인천의 도시 역사를 다룬 박물관이다. 센트럴파크역(인천지하철 1호선) 3번 출구에 붙어있어서 전철 교통편이 좋고, 더불어 송도의 랜드마크인 센트럴파크를 돌아볼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2018년 즈음에 개관하였으며, 3층 규모로 1층은 근대도시관, 2층은 인천모형관, 3층은 어린이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 관람요금 : 무료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 마감시간 30분 전까지 입장가능)
● 정기휴일 : 1월 1일, 매주 월요일(단, 공휴일인 경우 개관) 

 

 

 

1층 전시실 입구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 병인양요(1866) 이후 강화해역에 설치한 외국 선박 항행금지 표석

 

 

1883~1906

1876.02.27  강화도 조약 체결, 부산항 개항
1883.01.01  인천 개항
1883.06.16  인천 해관 설치
1883.09.19  인천항 감리 조병직 임명, 화도진 관아에서 근무 시작
1883.09.30  인천 일본 조계 설정에 관한 조약 체결

1884            내동에 감리서 신축, 감리 내동에서 근무
1884.03.06  인천 청국 조계 설정에 관한 조약 체결

1894.02.15  동학농민운동 발발
1894.07.25  청일전쟁 개전
1894.07.27  갑오개혁

1895.06.23  갑오개혁으로 인천항 감리서 폐지, 인천 관할부 신설
1896.08.06  인천항 감리서 복설
1899.09.18  경인철도 개통 (인천~노량진)

 

1903.08.11  감리와 부윤의 업무 분리, 부윤을 인천군수로 강등
1904.02.08  러일전쟁 개전 
1905.11.17  일본과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 체결

 

 

 

강화도조약 (1876년)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년)

 

인천 개항(1883년)

 

 

 

관지개석(關地界石) → 해관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건물이나 창고 주위에 세웠던 일반인 통제구역 표지석(1883년 이후)

 

전화기 → 송수화기가 분리된 수동식 전화기, 통화를 위해서는 교환원을 거쳐야만 했으며, 덕률풍, 득률풍, 전어기 등으로 불렸다. 

 

 

경인철도 개통(1899년)

 

인천박문보통학교 제12회 졸업기념 사진 (1922년) → 1900년 답동성당에서 설립된 사립학교 

 

조선인 부두 지도 (1884년)

 

 

 

화상지계(華商地界)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 청국 상인 수가 늘어나면서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 체결 → 정국전관조계 설치  

 

공화춘 간판(1910년대) → 산동성 출신 우희광이 선린동에 차린 중화요리집, 산동회관이었다가 나중에 공화춘(共和春)으로 개명 



 

▼ 지금 제물포는 조선의 중요 항구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조약들이 체결되던 1882년 만 해도 그곳은 인천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하나의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그러나 10여 명에 불과한 유럽인들을 제치고, 우후죽순처럼 몰려들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은 몇 년 새 그 작은 마을의 면모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제대로 시설을 갖춘 호텔만 해도 두 개씩이나 버젓이 들어서 있는데, 하나는 중국인이, 다른 하나는 다이부츠(大佛)라는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다. 샤이에 롱(Chaillé-Long), 조선기행 'Deux Voyages en Corée' (1887년)

 

 

 

 

▼ 각국조계(各國租界)

1884년 11월 조선 정부는 이미 인천에 전관 조계를 두고 있던 일본, 청국을 비롯해 영국, 미국과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을 체결하고, 일본과 청국조계를 둘러싸는 약 14만 평의 부지를 각국조계로 설정하였다. 1년 뒤 독일이 이 장정에 포함되면서 각국조계는 다섯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영사관이 행정을 담당했던 일본, 청국조계와 달리 각국조계의 행정은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神董公司)에서 맡아보았다. 신동공사는 다섯 나라의 영사와 세 명의 지주, 조선 측 대표로 참여한 인천항 감리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되었다. 세 곳의 조계 중 가장 넓었던 각국조계에는 외국인 공동묘지와 공원 등 각종 근대 시설이 들어섰다.

 

 

 


▼ 각국조계장정 영문본
1884년 11월 조선 측 대표 김홍집과 영국공사 파크스(Parkes), 미국공사 푸트(Foote), 청국총리교섭통상사무 위안스카이, 일본공사 다께조 사이에 체결된 인천항 각국조계에 관한 장정의 영문본이다.

 

 

일본조계(日本租界)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 상량문 (1888년)

 

 

 

1906~1914

1906.02.01  조선통감부 설치, 인천이사청 개정
1906.10.01  인천항 감리서 폐지, 인천군을 인천부로 승격
1907.05.22  인천이사청, 인천부 정명(町名) 개정 실시
1909.10.26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08.29  한일병합, 조선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개편

1910.09.30  인천이사청, 인천부로 개편, 한국 측 인천부 폐지

 

 

 

 

 

조선은행 & 제일은행 화폐

 

 

1914~1936

1914.03.01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공포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
1914.04.01  인천부 축소(현 중, 동구), 부천군 신설. 각국조계 및 청국조계 폐지
1918.10.27  인천항 이중 갑문식 선거 준공식 개최

1919.03.01  3.1 만세운동 전개
1919.03.06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천에서 3.1만세운동 시작
1919.04.02  민족대표 20명 인천 각국공원에서 한성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

1920.06.01  경인열차통학생회 한용단 결성
1923.01.05  인천 소재 정미소 여공 2천여 명, 한국인 여공 구타사건으로 동맹 파업
1923.07.10  월미도 유원지 개장
1926.03.22  인천 소재 일본인 정미소 직공 3천여 명 총 파업

1931.09.18  만주사변 발발
1933.05.30  인천부 신청사 준공
1933.10.08  인천 개항 50주년 축전 개최



 

 

 

 

 

▼ 인천부 지도 

1936년 발행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의 인천부 지도다. 일본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지형도를 바탕으로 항공사진에 색을 입혀 인천 시가를 정밀하게 표현했다. 당시 인천시가지의 지형과 주요 건물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성장하는 인천 - 관광의 인천항 (1935년)
조선총독부는 시정 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고, 식민지 조선의 관광을 상품화하기 시작한다. 인천은 1920년을 전후하여 관광도시로서 개발이 본격화되는데, 관광을 통해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 자료는 인천조감도와 인천의 관광명소가 기재된 관광안내서이다. 지도는 경인선 안쪽의 발달된 일본인 시가지를 부각하고 있으며, 인천항과 월미도는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하고 있다. 

 

 

 

 

▼ 인천개항 25주년 기념엽서 (1908년)
인천 개항 25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엽서다. 일본 신사가 있던 동공원, 인천거류민단사무소, 러일전쟁 당시의 러시아 군함 코레이츠호의 폭격 장면, 인천항 등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 인천항의 이중 갑문식 선거
조선총독부는 인천항의 최대 약점인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하여 1911년 6월 이중 갑문식 선거(도크) 건설공사에 들어가 1918년 10월 1차 준공을 보고, 1923년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중 갑문식 선거는 배가 정박하는 선거의 수심을 8~10m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선거와 바다 사이에 두 개의 갑문을 설치하여, 갑문 사이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조수와 관계없이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만 시설이었다. 선거 내에는 4,500톤 급 선박 세 척과 2,000톤 급  선박 다섯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부두에서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부설하여 하역과 동시에 육상 운송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은 이를 '동양 유일의 이중 갑문식 선거'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인천항 선거 역시 일제가 식민지 조선 수탈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였다. 축항 공사에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노역하였다.

 

 

월미도 공사도

 

 

 

 

▼ 합자회사 가토정미소(加藤精米所)
일제강점기 인천에 설립되었던 대표적인 일본인 소유의 대규모 정미소이다. 인천항은 조선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 본국으로 유출하는 핵심항구였다. 현지에서 현미를 정밀하게 가공(정미)하여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인천항 주변을 중심으로 일본인 자본가들이 대형 정미소들을 대거 세웠는데, 가토정미소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곳이 단순히 쌀을 가공하던 곳을 넘어, 열악한 노동 환경에 맞서 1926년  인천 정미소 노동자들이 대규모 동맹파업을 일으키며, 일제의 착취에 저항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개항장 거리의 건물 모형

 

인천우편국 (1923년), 우체통, 미야타 자전거

 

조선은행 인천지점 (1888년)

 

의양풍 건물 → 서양 건축 양식을 모방한 목조 건물로 당시의 인천측후소, 인천경찰서, 인천우편국, 조선신보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인천공회당

 

홍예문

 

 

 

 

 

1936~1945

1936.09.--  인천부의 영역을 확정(남구 및 연수구 일부)
1937.04.12  인천시가지계획령 공포
1937.07.07  중일전쟁 시작
1937.08.06  수인선 개통
1937.06.    조선기계제작소 화수동에 설립
1937.07.21  송도유원지 개장
1937.10.14  경인도로 확장 및 보수공사 준공
1938.04.01  일본 국가총동원법 공포
1938.10.11  동명학원, 소화(昭和)학원으로 명칭 변경

 

1940.01.19  경인시가지계획 공포
1940.04.01  인천부의 영역을 확장(남동, 부평, 계양, 서구 일부)
1940.01.02  일본육군인천조병창 부평에서 개창식 거행
1941.12.07  일본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1944.05.08  인천부 제1회 학도동원 실시, 인천 남녀 학생 360명 인천조병창에 강제 징용
1945.08.15  일본 쇼와(昭和) 천황 항복 선언

 

 

 

 

경승의 인천 → 인천 제1차 행정구역 확장을 한 다음 해인 1937년 제작된 관광안내서, 편입지역인 문학산과 송도해안이 묘사되었다.

 

 

 

▼ 경기도 공업용 수도 계획 개요

1939년 군수공장이 들어서고 있던 부평지역에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수도 관로를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경성 노량진 수원지에서 갈산동 부평배수지까지 송수관 매설도면이 첨부되어 있다. 

 

 

청나라 짐승모양 대포 (청국제 호포 또는 사자포라고 함)

 

 

일본육군인천조병창 제조 군도 → 1897~1945년까지 제작했던 30년식 총검으로, 총의 앞부분에 장착해서 백병전에 사용했다.

 

 

수인선 철도 (1937년)

 

수인선 협궤열차 (1930년대)

 

 

일본이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벌인 쇠붙이 모으기 캠페인

 

조선인 일상 통제를 위해 사용되었던 사이렌 탑

 

인천에서 맞이한 광복

 

인천시가 사용했던 현판, 동판,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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