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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따라/시(時)ㆍ문(文)ㆍ필(筆)ㆍ담(談)

(說) 우이동구곡기

by 금대봉 2022. 9. 4.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  

우이동구곡기는 1763년 조선조 영조 시대의 학자 이계 홍양호(耳谿 洪良浩)가 당시 북한산의 자연경관을 찬미한 유산기(遊山記)이다. 이 유산기는 <이계집>에 있는 것이다. 우이동구곡은 만경대(병풍암) 아래에서 시작되어 북한산의 동쪽을 향해 흐르는 계류를 이른다. 이 글에 소개된 우이동구곡은 도선사 아래 만경폭포(萬景瀑布)에서 시작되며, 북한산 초입인 현재의 그린파크 옆 시멘트 다리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또한 구곡을 끼고 오르는 길은 지금의 등산로와 일치하기도 한다. 예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경관이 수려한 계곡을 구곡(九曲)이라 하였다.

 

이계는 우이동 구곡을 이름한 연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 사람들은 골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이름하여 구곡이라 하였으니 원래 구(九)라는 숫자는 큰 숫자라는 의미로써 좋은 지명에 써 왔으며, 이는 주역에서 말하는 양(陽)의 대명사 숫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이나 해동(海東) 사람들은 좋은 지명에 구(九) 자를 즐겨 써 왔으며, 우이동의 경관이 도산, 석담, 무이구곡에 비겨 뒤지지 아니하니 우이구곡이라 함이 마땅하다. 만경대의 웅장 기험함과 달그림자가 맑고 뛰어나니 중국의 무이구곡과 견주어 못하지 않음이요, 도산과 석담도 일찍이 우이와 같았으리라.'

 

이계는 삼대에 걸쳐 우이동에 살면서 겸산루(兼山褸)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벗하고 살면서 그의 호도 이계(耳谿)라 하였다. 원래 우이동은 선조시대에 권필과 함께 시당에서 쌍벽을 이룬 계관시인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의 소유인 것을 이계가 매입하여 우이동 곳곳에 벗나무를 심어 봄철이면 우이동이 벚꽃의 명소가 된 시초가 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 시대의 우이동은 한성부(漢城附) 숭신방(崇信坊) 지역으로 이곳에서 보면 삼각산의 백운대와 인수봉이 소(牛)의 귀(耳)와 같이 보이므로 쇠귀리 또는 우이리라 불렀다. 이계는 쇠귀보다는 쇠뿔(牛角)이 더 좋다 하여 우각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고사성어에 '집우이'(執牛耳: 쇠귀를 잡는다)라는 말이 있으며, 이는 '패권을 잡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계는 이곳에 사는 것을 긍지로 삼았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고문헌 속에 수록된 것을 발굴해 그 현장을 추적해 본 것이다.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은 근대등반의 요람이자 국내 암벽등반사의 첫 장을 차지한 중요한 무대로서 그 비중이 크며, 역사적으로는 2000년 전에 우리의 선조(백제)가 도읍을 정한 오랜 내력을 지닌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북한산의 역사적 지식들이 망각 내지 인멸되어 가는 실정이며, 옛 지명과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에 약 260년 전의 <우이동구곡기>의 현장을 답사하여 고증하는 작업에 어려움이 뒤따랐으나 새로운 옛 지명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250여년 전의 이 계곡과 공해에 찌들고 지형이 변한 오늘의 계곡과 비교해 본다면 격세지감이 있으니,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을 실감케 한다. '삼각산 동쪽에는 만경대가 있고, 그 옆으로 백운대와 인수봉이 높게 솟아 있다.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 하늘이 닿을듯한 이 경치가 우리 집을 애워 싸고 있으며, 이러한 갈래의 물줄기가 흘러와서 우리 집 문전에서 다툰다. 이 계류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히면 높이가 열길 정도까지 솟구치기도 한다.' 원문의 서두에서는 겸산루 주변 경관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겸산루는 계곡에 인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곡 만경폭포(萬景瀑布) 
우이동구곡의 제1곡은 도선사 아래에 위치한 만경폭포(삼단연폭)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계는 이곳을 제1곡으로 구분한다. '날다람쥐도 기어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깎아지른 암벽에서 물줄기가 연무를 날리며 쏟아지며, 마치 하얀 천을 펼쳐 내린 듯하고, 물소리가 몇 리까지 은은히 진동하니 여기를 이름하여 만경폭포라 한다.' 지금의 이 폭포는 도선사에서 저수용 물을 사용하기 위하여 시멘트 구조물(방벽)을 만들어 놓아 원래의 지형을 변모시켰으며, 수량과 낙차가 그리 운대하지 못하다.

 

 

 

 

제2곡 적취병(積翠屛) 
이 폭포에서 아래로(동편) 열 걸음 정도 내려가면 이 글에서 나오는 평평한 상(床)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다. 이계는 이 바위 이름을 성석(醒石)이라 하였으며, 수백 사람이 앉아서 놀 만하다고 하였으나 좀 과장된 표현이다. 소풍객들이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는 장소라 하였으며 폭포의 찬 기운 때문에 술이 쉽사리 깬다 하여 성석이라 이름 한 듯하다. '여기서부터 주위의 산이 점점 낮아지고 골은 좁아진다, 좌우에는 이끼 덮인 푸른 암벽들이 마주 대하고 첩첩이 서 있으니 마치 큰 고개를 보는 듯하다.' 이계는 여기를 적취병이라 이름하였으니 청산(靑山)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하여 그렇게 표현한 듯하다, 여기를 제2구곡으로 구분한다.

 

 

 

 

제3곡 찬운봉(贊雲峰) ~
여기서부터는 계류가 순하게 흘러가며 계곡의 돌 색은 반점이 섞여 있다. 물이 그 위를 지나니 무늬처럼 퍼져서 흐른다. 왼쪽 언덕에는 여러 층의 바위가 봉우리를 만들었으며 깎아지를 듯이 서 있어 흔들리는 듯하다. 이 봉은 도선사 오르는 길 옆의 암벽을 표현한 듯하다. 지금은 도선사 오르는 도로의 확장공사로 바위를 깎아내려 원래의 경관이 변한 듯하다. 흘러가는 구름을 붙들고 먼 들판을 바라보게 되니 여기를 이름하여 찬운봉이라 하고 제3곡으로 구분했다.


제4곡 진의강(振衣岡) 
다시 산을 돌아 조금 내려오면 몇 길이나 되는 큰 바위가 물을 막고 높이 서 있으며, 물이 소리를 내며 쏟아지다가 평평히 흐른다. 여러 골짜기를 다 받친 듯이 솔바람과 물소리가 숙연히 귀에 가득 차니 여기를 이름하여 진의강이라 한다. 앞에는 종처럼 생긴 둥근 바위가 서 있고, 물이 부딪치면 맑은 소리가 울려서 멀리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이며, 여기가 제4곡이다. 종모양의 바위는 도선사 오르는 길 왼쪽에 서 있는 둥근 모양의 바위로 '나무아미타불' 글씨가 한자로 파여 있고, 지금은 이곳에서 클라이머들이 볼더링을 하기도 한다.

 

 

 

 

제5곡 옥경대(玉鏡臺) 
'또 계곡을 따라 아래로 몇 백 걸음 내려가면 넓은 바위가 돈대(墩臺)를 가로 막고 있어 흰구름이 머무는 것 같고, 맑은 물이 옥을 씻는 듯하다. 여기를 이름하여 옥경대라 한다.' 이계는 기름을 칠한 듯한 숫돌 같은 돌에 큰 글자를 써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장 답사 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으며, 필자의 생각으로는  도로 공사 시 매몰된 듯하다. '중간이 움푹 패여진 바위는 마치 소의 먹이를 담는 구유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곳을 세묵지(洗墨池)라 한다.' 이곳은 옥경대의 대석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문의 표현대로 마치 쇠구유와 같은 모양의 못(池)이다. 여기가 제5곡이다. 지금도 이곳에 봄, 여름철에 등산임수(登山臨水)를 즐기던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이다.

 

 

 

 

제6곡 월영담(月影潭)
'여기서부터는 물이 북쪽으로 흐르며 땅속으로 숨어서 흐르니 물이 보이지 않는다. 몇 리를 지나면 흰돌이 사방으로 넓게 깔려 있으며, 물의 맑고 깨끗함이 마치 거울과 같다. 한가운데가 반묘(약 15평) 정도나 넓게 파여진 곳이 있으며, 여러 봉우리들이 둘러싸여서 물에 비친 하늘이 막혔다 뚫렸다 한다. 이곳을 이름하여 월영담이라 한다. 이곳에서 앞을 바라보면 수락봉과 도봉의 산들이 높이 솟아서 마치 산수화의 그림 두루마리를 펼쳐 놓은 듯하다. 더우기 달빛 아래서 이 못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니 월영담이다. 여기가 제6곡이다.' 이 월영담은 지금의 선운상회 아래에 있는 소(沼)이다. 여름철이면 여기서 아이들이 수영을 한다. 지금은 몹시 오염되어 당시의 표현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제7곡 탁영암(濯影岩) 
'또한 100보쯤 지나오면 괴석(怪石)들이 놓여 있고, 부딪치는 물줄기들이 작은 폭포를 이룬다. 오른쪽으로는 거암들이 서 있고, 물은 게으르게 흐르다가 활처럼 굽어지기도 하며 멈춰 서기도 한다. 이 바위 위에 여러 사람들이 둘러 앉아 갓끈을 적시며, 술잔을 기울일만하니 탁영암이라 한다.' 이곳은 구곡 중에서 지형이 가장 많이 변한 곳으로 경관이 뛰어난 바위들이 도로확장과 시멘트 구조물에 의하여 메몰 된 듯하다. 원문에 기록된 표현과 너무나 거리감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아래로 내려가면 왼쪽)을 바라보면 천관봉(天冠峰)이 높이 솟아서 하늘을 내려앉을 듯하다. 이 봉은 높고 엄숙하기가 관(冠)을 쓴 도인들이 구름을 쓰고 앉은 듯하여 여기가 7곡에 해당된다.' 천관봉은 이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  옛 지명이며 연미지계가 끝나는 능선상에 위치한 암봉이다. 지금은 '코끼리바위', '키슬링바위', 또는 '주먹바위' 등으로 불리는 봉이다. 이 글 속의 표현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천관봉으로 이름이 전해 내려온 듯하다. 천관봉은 만경대로부터 우이령까지 뻗어나간 북한산 북릉 상의 하룻재와 해골바위 사이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암봉이다. 이곳은 클라이머들에게 좋은 볼더가 되기도 한다.

 

 

 

 

제8곡 명옥탄(明玉灘) 
'또한 계곡을 따라서 백 보쯤 아래로 내려가면 골짜기는 넓어지고, 물은 더욱 맑아지며 굽어 돌면서 서서히 흘러가니 소리가 없다. 이곳은 돌무리가 어지러이 흩어져 진(陳)을 친 말이 물을 마시는 듯하다. 날듯이 흐르는 여울이 뛰다가 머뭇거리고, 물소리는 옥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맑으니 이름하여 명옥탄이라 한다. 그 서쪽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니 천관봉 아래에서 시작되어 구불구불 흘러서 언덕을 끼고 동쪽으로 달려간다. 여기를 연미지주(然尾之州)라 하며, 그 위에 작은 정자가 있으니 소귀지당(小歸之堂)이라 부른다. 여기는 나의 삼대조(三代祖) 묘소가 있고, 그 북쪽에 작은 누각을 이루어 놓았으니 겸산루(兼山樓)라 한다. 단풍과 소나무 꽃나무와 과실나무들이 울창하게 어울려 있고, 그 동쪽 수십 보쯤에는 육각면의 정자가 큰 바위 절벽에 서 있으니 이를 수재정(水哉亭)이라한다. 옥탄지수와 연미지계가 합류하여, 수재정 아래로 흘러서 맑은 담(潭)을 이루니 여기가 제8곡이다.' 여기서 연미지계는 처음 발견된 계곡의 지명으로서, 이 연미지계는 천관봉에서 두 갈래의 계곡이 흘러내려 합류되며, 천도교회관 앞에서 구곡과 합류한다.  두 갈래의 계곡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연미지계라 하는 이름이 연유된 것 같다.


제9곡 재간정(在澗亭)
여기에 이르러서는 양쪽 언덕이 트이고, 시계가 넓어지며, 물은 맑고 모래는 희며, 자주 돌을 걸치고 물에 임하니 재간정이라 한다. 여기는 삼대로 상국(相國)을 지낸 서공(숙종 때 영상 徐宗泰, 영조 때 좌상 徐命均, 영상 徐志修)의 옛 집터이다. 여기가 제 9곡이다. 조선조 때 삼국을 지낸 서공은 창동서씨 가문의 삼정승을 이르는데, 창동서씨의 구기는 원래 창골(지금의 북창동)이었으니, 우이동의 옛 집터라 함은 별장지였다고 추정한다. 이상의 제1곡부터 9곡까지의 골을 이름하길 우이골(牛耳之洞)이라 한다. 물이 여기서부터 끊어져서 동쪽으로 가고, 큰 들판으로 나아가니, 이는 모두가 만경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계곡의 거리는 5리가 조금 넘는다. 물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 돌이 되고, 기암층폭이 짧은 거리마다 바뀌어 나타나니, 이런 절경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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